담백한 쇠고기 요리에는 부르고뉴 와인, 기름기가 풍부한 메뉴에는 보르도 와인이 잘 어울린다. GETTYIMAGES
가을이 절정인 10월이다. 중세부터 근대까지 유럽에서 가을은 고기의 계절이었다. 가축에게 먹일 사료가 바닥나는 겨울이 오기 전, 늦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도축을 했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인이 11월을 '피의 달'이라 부른 것도 그래서다. 이렇게 얻은 고기로 만드는 대표적인 고급 요리가 스테이크다. 그리고 스테이크 옆에는 으레 레드 와인이 놓인다. 그런데 이 공식을 만든 건 와인의 나라 프랑스가 아니라 바다 건너 영국이다.
스테이크는 고대 노르드어 '스테이크'(steik·구운 고기)에서 왔다. '꼬챙이에 꿰어 굽다'라는 뜻의 동사 '스테이캬(steikja)'가 뿌리로, 막대기(stick)·말뚝(stake)과 어원이 같다. 이 꼬챙이 구이를 가장 사랑한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인은 쇠고기 덩어리를 쇠꼬챙이에 끼워 장작불 앞에서 천천히 돌려 굽는 로스트비프를 즐겼다. 부잣집 부엌에서는 개가 쳇바퀴 위를 달리며 꼬챙이를 돌렸는데, 이 일을 하는 '턴스핏(turnspit)'이라는 견종이 따로 있었을 정도다. 이 덩어리를 한 사람 몫으로 잘라 불에 직접 구운 것이 비프스테이크다.
영국, 쇠고기의 나라가 되다
영국이 이만큼 쇠고기를 먹게 된 건 수백 년에 걸친 일이다. 출발。은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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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노가 대거 목숨을 잃어 일손이 모자라자, 지주들은 손이 덜 가는 목축으로 눈을 돌려 경작지를 목초지로 바꿨다. 16세기에 시작된 인클로저 운동으로 목초지는 더 넓어졌다. 공동 경작지에 울타리를 쳐 지주의 땅으로 만드는 이 운동 탓에 땅에서 밀려난 농민들은 도시로 흘러가 노동자가 됐다. 마침 증기기관과 방직 기술이 발달하면서 도시에는 노동자 수요가 폭발하고 있었다. 소를 키울 땅이 넓어지는 동시에, 그 고기를 사 먹을 도시 노동자도 늘어났다.
남은 문제는 겨울이었다. 사료가 없으니 가을에 소를 잡아 소금에 절여둘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18세기 농업혁명이다. 순무와 클로버를 심으면서부터 소를 겨우내 먹일 수 있게 됐다. 순무는 땅에 묻어둔 채 겨울에도 캐서 소에게 먹일 수 있었다. 콩과 식물인 클로버는 땅을 기름지게 만들뿐 아니라, 베어 말리면 건초가 됐다. 여기에 로버트 베이크웰의 품종 개량으로 소는 더 크게 자랐다.
19세기에는 철도와 냉장 기술이 쇠고기 유통을 바꿨다. 미국 중부에서 키운 소는 시카고에서 도축돼 냉장 화차를 통해 동부 대도시로 보내졌고, 이 목장들에는 영국, 특히 스코틀랜드 자본이 대거 들어가 있었다. 1880년에는 냉동선에 실린 호주산 쇠고기가 런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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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쇠고기는 영국인의 정체성이 됐다. 18세기 런던에는 고기를 구워 파는 '찹하우스'가 성업했고, 1735년엔 '비프스테이크 클럽'이 결성됐다. 작가 헨리 필딩은 노래 '옛 영국의 로스트비프'로 쇠고기 먹는 영국인의 기개를 찬양했으며,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을 '로스비프(rosbif)'라고 불렀다. 영국인에게 쇠고기는 부와 국력의 상징이 됐다.
그렇다면 이런 영국인이 가장 사랑한 와인은 무엇이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숙적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다. 보르도는 12세기 중반부터 1453년 백년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 왕실의 영지였다. 이 시기 영국은 보르도 와인을 엄청난 양으로 들여왔고, 영국인들은 이를 '클라레'라 부르며 즐겼다. 18세기에는 프랑스와의 잦은 전쟁과 높은 관세 탓에 포르투갈 포트와인, 스페인 셰리 같은 주정강화 와인(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해 알코올 도수를 높인 와인)에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1860년 관세가 크게 내려가자 보르도 와인은 다시 영국 중산층 식탁에 올랐다. 쇠고기가 대중화되던 바로 그 시기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영국은 보르도 와인의 가장 중요한 시장이었다. 스테이크에 레드 와인을 곁들이는 문화는 이렇게 영국 식탁에서 만들어졌다.
영국 식탁에서 탄생한 조합
이 조합이 오래 살아남은 데는 맛의 궁합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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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섞어 만드는 보르도 레드 와인은 강한 타닌감이 특징이다. 이 떫은맛이 스테이크의 기름기를 씻어내 다음 한 입을 부른다. 하지만 꼭 보르도산일 필요는 없다. 미국, 칠레, 호주 등 세계 주요 산지의 레드 와인 상당수가 보르도의 품종과 양조 방식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은 결이 다르다.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드는 부르고뉴 레드 와인은 섬세하고 산도가 높으며, 비단처럼 매끄러운 질감이 특징이다. 타닌이 강한 보르도 와인과는 대비된다.
그렇다고 스테이크에 부르고뉴 와인이 안 맞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조리법도, 고기 품종도 다양해졌다. 겉을 강하게 시어링한 스테이크가 있는가 하면, 육질을 최대한 부드럽게 살린 스테이크, 기름기가 많아 고소한 스테이크도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안심처럼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부위엔 부르고뉴, 강하게 굽거나 기름기가 풍부한 부위엔 보르도 스타일의 레드 와인을 권한다.
음식 페어링에 정답은 없다. 다만 역사와 맥락을 알면 고르는 재미가 커진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은 음식 지식을 살찌우기에도 좋은 시기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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